
서론
기원전 605년, 597년, 586년 세 차례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침공하였습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과 그의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4,600명의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바벨론의 느부사라단은 예루살렘 성을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귀인들의 집을 불 지르고, 숱한 보물들을 빼앗아 갔습니다. 그런데 바벨론 침공의 가장 굴욕적인 사건은 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침입한 것입니다. 바벨론의 군사들은 성전에서 제사용 금은 그릇과 가마, 부삽, 불집게, 숟가락, 놋그릇 등을 쓸어갔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가지고 간 놋의 무게를 측량할 수 없다고 합니다. 빼앗아간 금은 그릇의 합계가 5,400개나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나라의 성전이 짓밟히고, 제사를 드리지 못하게 성전이 파괴되고, 제사용 그릇들이 다 빼앗기는 것보다 더 큰 굴욕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도 어떤 일보다 성전이 파괴되고 제사가 붕괴되는 것을 가장 슬퍼하십니다.
사막의 교부 포에멘은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오지 않았더라면 예루살렘 성전은 불타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탐욕이 우리 영혼에 나태함을 가져오지 않는다면 우리가 원수와 대적할 때에 패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왜 우리가 영적으로 패배합니까? 느부사라단 같은 마귀가 하나님의 성전 같은 우리를 침략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을 라이프니츠는 ‘소우주’라고 합니다. 어떤 이는 우리의 몸을 ‘세계’라고 합니다. 로마서 12장에는 우리의 몸이 ‘산 제물’이라고 합니다. 오늘의 본문인 고린도전서 3장에서는 ‘성전’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한 없이 크고 귀한 것이 우리의 몸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기에 거룩한 곳입니다. 거룩한 성전은 더럽히지 말아야 합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때 성전 터에서는 돌을 깨는 망치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계시는 구별된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몸을 항상 깨끗이 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목욕한 자는 발을 씻으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목욕한 자도 발은 씻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전인 우리의 몸을 항상 깨끗이 해야 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구약에는 ‘정결법’이란 특별한 법이 있습니다. 한센병, 유출병 등에 걸린 사람은 다른 사람과 함께 하지 못한 부정한 병이었습니다. 또 정결법에는 ‘먹으라’, ‘먹지말라’고 하는 음식들이 있습니다. 이 모두가 우리의 몸과 영혼을 깨끗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성전인 우리의 몸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므로 항상 깨끗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31에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 몸을 위하여 아무 것이나 먹고 마실 수 없다는 말입니다. 에베소서 5:18에는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라고 합니다. 성전인 우리의 몸을 더럽히지 말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6:15에는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고 합니다. 성전인 우리는 머리인 그리스도의 지체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지체인 우리의 몸을 절대로 더럽히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교회를 여러 말로 부릅니다. 예배당이라고 하기도 하고, 교회라고 하기도 합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성당 혹은 대성당이라고 합니다. 특별한 기능으로 말할 때는 성전 혹은 사원이라고도 합니다. 교회를 무엇이라고 부르는 것은 자신의 신앙고백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은 성령 하나님이 계시는 거룩한 곳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성전답게 정결하게, 영광이 빛나게 그리고 예배하는 자리가 되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되어 우리의 육체적 삶이 하나님께 늘 거룩한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고린도전서 3:16에는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에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성전은 성령이 항상 계시는 곳입니다.
“성전”이란 헬라어로 ‘나오스’인데 거룩한 장소 즉 ‘성소’(sanctuary)를 가리킵니다. 헬라어에서 성전의 다른 말인 ‘히에론’은 성전지역(temple area)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이끌리어 성전 꼭대기에 가셨다는 말은 ‘나오스’가 아니라 ‘히에론’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성전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19에서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든 네가 삼 일 동아에 일으키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21절에는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여 예수님이 성전인 것을 밝힙니다.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은 개인적으로나 집합적으로 하나님의 성전이라 불립니다.
“하나님의 성전”이란 헬라어로 ‘나오스 데우’인데 기독교 공동체 전체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이란 하나로 통일된 유기체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 모두가 하나님의 성전이란 의미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성막을 세웁니다. 성막이 완공되었을 때에 성막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여 모세가 감히 성막 안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성한 다음 성전 봉헌을 위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성전에 가득하였고, 성전 안의 찬란한 영광 때문에 제사장들이 감히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성막, 성전은 하나님의 영이 머무는 곳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곳입니다. 이런 성전의 영광이 성전인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우리가 성전인 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막이나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인 ‘쉐키나’가 가득하였습니다. ‘쉐키나’로 성막은 작고 초라하였지만 영광이 가득하였던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영이 가득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그 안에 영이 머무는 자니”,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영이 충만하니”라고 하여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영이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라고 하여 바울이 하나님의 영이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라고 하여 베드로가 하나님의 영이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라고 하여 스데반이 하나님의 영이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이라고 하여 초대교회 일곱 집사들은 하나님의 영이 가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 모두가 성전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전 같이 든든하고, 은혜롭고, 찬양이 넘치고, 다른 사람에게 칭찬과 은혜가 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교회이고, 세상 사람들에게 참 교회의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지난 번 스코틀랜드 교회의 총회에 갔을 때에 에딘버러의 신학교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에딘버러 광장 중앙에 있는 좋은 예배당이 지금은 식당, 관광 상품 가게, 문화공연장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몽골의 울란바타르에도 아주 오래 되고 잘 지은 러시아 정교회가 있는데 들어가 보니 관광 상품을 파는 가게였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거룩한 장소였던 성전이 이제는 종교적 모양만을 과시하는 문화공간이 된 곳이 한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나가면 더 이상 성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나가면 우리의 몸은 성전이 아닙니다. 사울은 하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지만 하나님의 영이 떠나니 성전은커녕 무당집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귀신 들린 자들을 보면 잡된 영이 그 속에 있으므로 잡소리를 내고, 귀신소리를 냅니다. 요한계시록 16:14에는 거짓 선지자들을 “그들은 귀신의 영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지만 귀신에게 사로잡힌 사람은 귀신 집이 되고 맙니다.
마태복음 12:44에는 더러운 귀신이 쉴 곳을 찾아 나갔다가 다시 들어옵니다.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이라고 합니다. 청소된 깨끗한 집에 귀신은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왔다고 합니다. 귀신은 사람의 육체를 “내 집”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인데 귀신은 귀신의 집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 아니면 귀신의 집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이중성이 있습니다. 교회의 이중성은 우리의 이중성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았지만 아직도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거룩하지만 아직도 거룩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완전하지만 아직도 불완전합니다. 우리는 하나이지만 아직도 여전히 나뉘어져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 그대로 교회도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온전한 성전이고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결코 교회가 온전하지 못하고,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늘 ‘내가 거룩한 성전이다’, ‘내가 하나님의 교회이다’라는 생각을 해야 하며, 그 외침이 있어야 합니다.
시편 84편에는 성전을 주의 장막, 여호와의 궁정, 주의 제단, 주의 집, 주의 궁정, 하나님의 성전, 여호와의 성전, 여호와의 뜰 등으로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었으면 이렇게 귀한 이름들로 부르고 칭송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의 집이며, 아름다운 뜰이며, 찬란한 궁정 같이 칭송의 대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우리 자신을 더럽히지 말고 거룩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3:17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직접 멸하신다고 합니다. 성전인 우리는 더럽히면 안 되고 늘 거룩해야 합니다.
“더럽히면”이란 말은 ‘프데이레이’라는 헬라어이며, “멸하시리라”는 말은 ‘프데레이’입니다. 두 단어가 비슷한 발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더럽힌다는 말과 멸하신다는 단어를 재미있게 대비하고 있습니다. 성전을 더럽히면 무서운 대가를 받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프데레이’라는 말은 ‘망치게 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만약 누구라도 하나님의 성전을 훼손시킨다면 하나님이 그를 망하게 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성을 훼손하는데 대한 보응을 철저히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이 보응을 공의로운 처사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민수기 19:20에는 “사람이 부정하고도 자신을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면 여호와의 성소를 더럽힘이니 그러므로 회중 가운데에서 끊어질 것이니라”고 합니다. 성전을 직접적으로 더럽히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더럽히면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교회가 왜 더럽습니까? 내가 더러우니까 교회가 더럽습니다. 성전을 더럽히는 것은 죽을 만큼 큰 죄입니다. 우리 몸을 더럽히면 이 또한 죽을 만큼 큰 죄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합니다. 같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도 거룩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전처럼 늘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너희도 그러하니라”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그게 너희들이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고, 너희도 거룩한 성전이다. 그게 너희들이다’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하나님이 인정하실 거룩한 성전입니까? 우리가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거룩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카데쉬’라는 말인데 ‘잘라서 떼어놓다’는 뜻입니다. 헬라어로는 ‘하기오스’인데 ‘분리되다’는 뜻입니다. 거룩해진다는 것은 구별되는 것, 탁월하고 비범해지는 것, 세상 사람들과 수단이나, 방법이나, 생각이나, 삶의 방식이 다른 것을 의미합니다. 거룩한 성전인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는 거룩한 하나님이다”라고 하십니다. 레위기 19:2에는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고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성도는 거룩해야 합니다. 성도인 우리는 거룩한 성전답게 생각과 삶이 거룩해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의 거룩한 삶을 성경은 여러 곳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행2:47)라고 합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행6:3)이라고 합니다.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11:26)고 합니다.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행22:2)라고 합니다. 이런 성경구절을 통하여 초대교회 성도들의 성전 같은 삶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척 콜슨이 말합니다. “교회의 과업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The task of the church is not to make men and women happy, it is to make them holy).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라 거룩함입니다.
살아있는 물고기가 짠 바닷물에 살지만 짠물이 몸속에 물들지 않는 것처럼 세상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는 안 됩니다. 살아있는 물고기가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듯이 우리는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거룩한 성전 같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런 힘 있는 생명력과 영적 기운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거룩성의 힘입니다.
야고보서 1:27에는 참된 경건 즉 거룩한 성도의 삶의 모습을 이렇게 말합니다.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세상에 물들지 않기 위하여 소극적 자세로 세상을 피하고 살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을 관리해야 합니다. 이런 거룩함을 지키는 영적 관리의 방법이 기도와 묵상입니다.
교회는 치외법권지역이 아닙니다. 교회는 공권력이 들어올 수 없는 지역이 아닙니다. 그러나 관리자의 동의 없이 경찰력을 투입하는 것을 금기시하고 있습니다. 공권력을 교회에 투힙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요건이 필요한데 법률상 요건을 충족해야 합니다. 국가는 교회법과 국가법이 충돌하는 것을 자제합니다. 그래서 교회나 사찰 등 종교시설은 관습법을 존중하여 공권력을 자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범죄자나 시위를 주동하는 행동가들이 종교시설에 피신하게 되고 경찰은 피신한 자들을 물리적으로 구인하는 것을 조심스럽게 생각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인 우리 속에 세상의 온갖 것들을 품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 들어온 것들을 거룩하게 변화시켜야 합니다. 나아가서 세상의 세속적인 것들이 우리 속에 침범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거룩한 성전으로서의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결론
암브로시우스는 히에로니무스, 아우구스티누스, 니사의 성 그레고리와 함께 서방교회의 4대 교부라 불리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가 밀라노의 주교로 있던 주후 386년 방탕한 젊은 시절을 보내던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를 만나 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주후 390년 로마황제 테오도시우스는 데살로니가의 민란을 제압하기 위하여 1,500명의 양민을 학살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황제의 악행을 본 암브로시우스는 황제가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목숨을 걸고 막았습니다. 황제가 마음을 잘못 가졌다면 암브로시우스를 죽이고 교회에 들어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부활주일 아침 교회에 들어오려는 황제를 입구에서 막으며 그는 “들어올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황제는 암브로시우스의 영적 권위를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가 성탄절에 다시 왔습니다. “못 들어갑니다.” 그는 단호하게 황제의 입장을 몸으로 막았습니다. 황제는 “성경에 보면 다윗도 죄인이 아니었습니까?”라고 하였고, 암브로시우스는 “황제께서는 다윗의 죄를 모방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다윗의 참회까지도 모방하셔야지요”라고 단호하게 꾸짖었습니다. 황제는 암브로시우스의 외침에 회개한 다음에 밀라노 교회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황제에게 암브로시우스는 다윗을 깨우치게 한 나단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후에 황제는 암브로시우스를 이렇게 평가하였습니다. “내 일평생 내게 진리를 말해 준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다. 그 사람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훌륭한 기독교인인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이다. 나는 그로 인해 그릇된 길에서 돌이켜 올바른 길을 들어서게 되었다.”
교회는 누구나 환영합니다. 모두가 다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해야 들어올 수 있는 거룩한 곳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세상의 온갖 더러운 것이 눈, 귀, 코로 들어오는 것을 거르는 필터가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의 더러운 것이 거룩한 성전인 우리 속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성전을 깨끗하게 숙청하셨습니까? 성전에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이 그 안에 가득했습니다. 기도하는 집에 있어야 할 기도가 없었습니다. 성전인 우리는 예수님의 숙청의 대상이 아닙니까? 우리 속에 없어야 할 것들을 하나하나 제거합시다. 예수님께서 채찍을 드시기 전에 스스로 깨끗이 제거해야 합니다. 성전인 우리 속에 있어야 할 것들을 있게 합시다. 성전은 기도하는 집인데 기도가 있게 합시다. 성전은 말씀이 선포되는 집인데 말씀이 있게 합시다. 성전인 우리 속에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있기를 바랍니다.
2012년 40일 특별새벽기도회의 주제가 ‘시편의 교회’였습니다. 시편은 하나님의 성전을 성전, 성소, 여호와의 집, 주의 집, 하나님의 집, 주의 전, 여호와의 처소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 성소, 여호와의 집, 주의 전, 여호와의 처소가 되어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으로 빛나고 떠나지 않는 거룩한 몸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