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론
역사에는 골육상잔의 비사(秘事)가 끊이지 않습니다. 이런 역사의 어두운 면은 우리나라의 조선조에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태종의 큰 아들이었던 양녕대군은 주색을 즐기고, 풍류를 좋아한 위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그는 당대의 명필이었고, 문장가였고, 학문이 깊은 천재성을 가지고 있는 호걸이었지만 이런 그의 숨은 재능을 숨겼고 아버지 태종도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합니다. 그는 부왕의 뜻이 자신이 아니라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에게 있는 것을 눈치 채고 미친 척하여 세자의 자리 대신 자유를 누리며 주유천하로 일관하였다고 합니다.
양녕대군이 미친 척한 것은 피비린내 나는 형제의 난을 피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호걸형이었던 양녕의 선택으로 초기 왕조가 평안했던 것입니다. 양녕대군이 좀 어리석게 보이므로 충녕대군이 왕이 되어 훗날 세종대왕으로 왕조에 빛나는 인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때로는 미친 척해야 하고, 어리석은 자가 되어야 하고, 잘 못한 것이 없지만 참아야 하고, 모든 것을 용납해야 하고, 보고 알고 있는 것이지만 못 본 척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므로 사람들 사이의 평화와 복음전파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미칠 이유가 있습니까? 분명히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미쳤다는 오해와 비난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3:21에는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고 합니다. 또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심을 보고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였습니다.
바울도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자신이 미쳤다는 말을 합니다. 고린도후서 5:13에는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미쳤다는 말을 들어야 예수를 잘 믿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 온 성도들이 방언을 말할 때에 하나님의 은사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 와서 온 교회가 미쳤다고 할 것입니다. 이런 오해는 당연한 것입니다. 세상의 교회에 대한 오해는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어리석은 자들이고, 꼴통이고, 무식쟁이이고, 환상주의자들이고, 비현실주의자들이라고 비난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어리석음이란 여러 형태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을 어리석음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하늘의 지혜가 없는 것을 어리석음이라고 합니다. 셋째는 쉽게 자기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어리석음이라고 합니다. 넷째는 감사를 알지 못하는 것을 어리석음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을 어리석음이라고 하는데 오히려 세상이 그리스도인에게 대하여 어리석다, 바보 같다고 합니다. 요즘 그리스도인은 동네북입니다. 흔히 말하는 호구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바보 취급을 받고 살아가는 시대입니다.
프랑스의 사상가 볼테르는 성경과 기독교는 100년을 못 간다고 했습니다. 무신론 철학자 니체는 그리스도인들을 생활에 기쁨이 없는 어리석은 자라고 하였습니다.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은 기독교를 무지한 종교라고 폄하하였고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라는 책까지 썼습니다. 그들의 눈에 볼 때 그리스도인은 어리석은 바보같이 사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래리 허타도의 ‘처음으로 기독교인이라 불렸던 사람들’이란 책에는 “외부관찰자들은 예외 없이 기독교인들을 가리켜 유별나고, 이상하며, 유해하다고까지 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유대인과 이교도들이 똑같이 그리스도인을 비정상적으로 이렇게 본 것입니다. 2세기에는 그리스도인들을 근친상간범, 가족파괴범, 식인범이라는 죄목으로 고소했습니다. 그리스도인 서로가 형제자매라고 부르는 것을 ‘근친상간’이라고 하였고, 믿지 않는 가족을 배제하고 자기네들끼리만 먹고 마신다고 하여 ‘가정파괴’라고 하였고,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을 ‘식인’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당시에는 성찬식이 순교의 빌미가 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세상 사람들이 볼 때 그리스도인은 얼마나 허황한 바보였는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바보로 취급되어도 괜찮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똑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끝까지 인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가지고 있고,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들은 아무리 바보라고 하고, 세상에서 ‘왕따’가 되어도 자존감을 잃지 않고 끄떡하지 않습니다.
빌립보서 2:8의 “자기를 낮추시고”라는 말은 ‘케노시스’라는 말인데 ‘자기비하’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낮출 수 있는 것은 높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바울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 그룹에 속한 사람이었지만 자발적으로 바보 그룹에 속하였습니다. 바울은 가문이나, 학문이나 모든 면에서 모자랄 것이 없지만 그리스도 때문에 비천해지고, 어리석게 되고, 매를 맞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도 그리스도를 위한 바보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바보가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4:10 상반절에는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라고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때문에 바보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아니면 바보가 될 이유가 없는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어리석고, 약하고, 비천하고,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고,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비방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모습을 떠올려보면 완전히 바보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때문에”라는 말은 헬라어로 ‘디아 크리스톤’인데 ‘그리스도를 위하여’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스스로 어리석게 된 것은 그리스도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이 바보로 살아간다고 당당하게 증언합니다.
그리스도 때문이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보로 사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보노릇을 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할 뿐만 아니라 영광스런 일입니다.
손자한테 지는 할아버지가 많이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손자한테 못 이깁니다. 아이들한테 져주는 어른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못 이깁니다. 할아버지나 어른들은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져주는 것은 당연합니다. 할아버지나 어른들이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힘이 있기에 져주기도 하고, 어리석은 일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뺨을 맞아봤습니까? 그리스도 때문에 문전박대를 받아봤습니까? 그리스도 때문에 오해와 박해를 받아봤습니까? 저는 받아봤습니다. 그리스도 때문이라면,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이런 일은 당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영광입니다. 이런 어리석은 일을 당하는 것이 감사와 기쁨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때문에 가난하게 되고,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모든 것을 다 배설물같이 버리고 아쉬워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스스로 바보가 된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한 일이었습니다.
캐더린 도허티가 말했습니다. “세상에는 바보들, 그리스도를 위한 바보들이 필요해 보인다. 지형을 바꾼 이들은 바로 그와 같은 바보들이었다.” 그리스도의 바보들이 세계지형을 완전히 바꾼 것입니다.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 선교사들 그리고 성도들이 세계의 지형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바보들만이 바꿀 수 있는 엄청난 바보짓을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보가 되는 것은 참으로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바보가 되는 일은 옛날 바울에게만 아니라 지금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같은 기쁨이며 감사로 기억되는 일입니다.
히브리서 11:26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합니다. 모세는 히브리인이었으며, 애굽 왕의 종인 히브리인의 아들이었으며, 버려져 애굽 공주의 아들이 되었으며,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모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모를 받으며 바보가 되었다고 합니다.
모세는 버림을 받은 유기아였습니다. 아기일 때 버려져 늘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헤어나지 못하여 충동적인 살인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은 입이 뻣뻣하다고 생각하여 말에 자신감이 없었습니다. 또 그가 스스로 말하기를 자신이 타국의 객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모세가 바보가 되고 낮은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민족의 지도자로 쓰셨습니다.
“One fool at least in every married couple”(결혼한 부부의 어느 한쪽은 바보여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모두 너무 똑똑하면 가정이 편하지 않습니다. 한쪽이 약간은 모자라고, 모르는 척하고, 이길 수 있지만 져주는 자세를 가져야 가정이 편합니다.
부부가 아니라도 모든 인간관계에서 한쪽이 바보가 되어주는 것은 최상의 관계를 형성합니다. 아름다운 세상에서는 강한 자만 바보가 될 수가 있습니다. 지식과 지혜가 있는 자만이 스스로 자신을 겸비하게 낮추고 어리석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3절에는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바보가 됩시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가 되고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면 세상의 사람들을 얻게 되고 구원받게 할 수 있습니다.
존 사워드(John Saward)는 ‘완전한 바보들’(Perfect Fools)이란 책에서 완전과 어리석음은 기독교의 영성 안에서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완전한 사람이 바보가 될 수 있습니다. 완전함과 어리석음은 하나입니다. ‘완전한 바보들’은 바울부터 오늘까지 그리스도를 위한 어리석음의 개념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어리석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것입니다. 완전한 자만 바보가 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2:10에는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보가 되고 약자가 되었는데 이 때 그는 강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때문에 바보가 되므로 완전하고 강한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내가 바보가 되므로 사람들을 지혜롭고 강하게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4:10 하반절에는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라고 합니다. 내가 바보가 되니 다른 사람들이 지혜롭고, 강하고, 존귀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얼마나 큰 보람입니까. 예수님이 비천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가장 위대하고 지혜롭게 하신 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비천하게 되고 바보처럼 되고 세상 사람들을 지혜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이 또 얼마나 그리스도를 닮은 삶입니까.
복음을 전한 사도들이나 복음전파자들은 고통과, 박해와, 어려움 가운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받은 고린도인들은 지혜롭고, 강하고, 존귀하게 되었습니다. 복음전파자들이 바보가 되므로 복음을 받는 사람들이 지혜롭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바울은 바보가 되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고린도교인들은 지혜롭게 되었습니다. 언제나 복음은 역설적입니다. 복음은 역설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죽으므로 새 삶을 얻습니다. 복음으로 바보가 되므로 지혜롭게 됩니다. 약하므로 강하게 됩니다. 아무 것도 없으므로 모든 것을 다 얻고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역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은 헬라어로 ‘엔 크리스토’인데 이 용어는 바울신학의 기본어입니다. 바울서신에 무려 164회나 사용한 바울의 고유어입니다. 특히 에베소서에서는 30회 이상이나 이 용어를 사용합니다. 이 말은 바울의 고백적 논리입니다. 구원의 진리와 신앙의 본질을 설명하는 함축적인 용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등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삶을 열거합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예수님의 문하생이 된 것을 자랑합니다. 바울은 가문의 부요함을 타고 났지만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부요함을 증거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의 자랑입니다.
이사야 53:5에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징계와, 고통과, 어리석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고, 회복되었고, 구원 받았고, 지혜가 있고, 존귀하고 강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이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하게 된 은총입니다.
‘어리석음’의 반대는 ‘지혜로움’일 것입니다. 지혜가 어디에서 옵니까? 성경은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라고 합니다. 지혜가 무엇입니까?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라고 합니다. 지혜를 가지면 어떻게 됩니까? 성경은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지혜는 이렇게 값진 것입니다.
‘알리바바’의 마윈회장이 얼마 전 연세대학교의 ‘2018 글로벌 지속가능발전 포럼’에서 강연하였습니다. 그의 강연은 그냥 첨단 IT기업의 회장이 아니라 신앙인같은 내용들을 쏟아냈습니다. 그는 “나는 확신한다. 인공지능(AI)이 인간의 지식을 이길 수는 있지만 지혜를 이길 수는 없다”고 단언하였습니다. 또 그는 “인공지능과 경쟁해서 이기려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성공하고 싶다면 EQ(감성지수)를 높이고, 지고 싶다면 IQ(지능지수)를 높여라. 하지만 존경받고 싶다면 LQ(사랑지수)를 높여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마음에 쏙 드는 말을 하였습니다. 지혜와 사랑이 무엇입니까? 지혜와 사랑은 근본이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께 의뢰할 때에 비로소 얻을 수 있고, 엄밀히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현대인이 과학과 기술과 지식과 정보를 좇아가다보면 패배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승부해야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배제하고 첨단 지식만 좇아가다보면 인공지능 ‘AI’에게 질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잃게 되는 것을 꼭 명심해야 합니다.
잠언에서는 만물이 창조될 때 사용된 창조의 원리를 ‘로고스’ 대신 ‘지혜’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는 ‘케투빔’(지혜문서) 안에 나타난 논리를 ‘지혜 그리스도론’(Wisdom Christology)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우주창조가 하나님의 ‘지혜’로 창조되었음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지혜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지혜는 하나님의 창조의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과학은 지혜에서 나오고, 최고의 과학은 지혜입니다.
브루스 윌키는 잠언 1장을 강해하면서 의와 지혜의 연관성을 밝혔습니다. 그는 의로움은 지혜라고 하였습니다. 잠언의 목적이 잠언 1:3에 있습니다.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공경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지혜가 생깁니다. 지혜는 사람을 의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의로운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지혜는 ‘그리스도 안에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참 지혜는 구원받은 자가 얻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를 얻으려면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구원을 얻어야 가능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물로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지혜를 얻어 슬기로운 삶을 사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며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고린도전서 1:24에는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리스도를 전하고 믿게 하는 것이 능력 있게 살게 하고, 지혜 있게 살게 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그리스도를 전하고 믿게 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지혜를 사람들에게 얻게 하는 것이 큰 사명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때문에 바보가 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를 얻게 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바보가 되는 것도 은총입니다. 우리가 바보가 되므로 많은 사람들을 강하게 하고, 존귀하게 하는 놀라운 일이 우리 삶의 현장에서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결론
헨리 나우웬이 들려준 이야기 가운데 매일 아침 갠지스 강둑 큰 나무 아래에서 묵상하는 노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아침 노인이 묵상을 마친 뒤 물속에 살 가망이 없이 떠내려가는 전갈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손을 내밀어 생명을 구해주려고 했지만 전갈은 침으로 노인을 쏘았습니다. 노인은 본능적으로 손을 거두어 드렸습니다. 몇 분이 지난 뒤 노인은 다시 전갈에게 손을 뻗쳤지만 전갈은 꼬리의 침으로 노인을 찔렀습니다. 노인은 손이 붓고 얼굴이 일그러지고 고통스런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그 때 지나가던 사람이 말했습니다. “불쌍한 노인장, 사납고 흉측한 전갈 때문에 귀한 생명을 버리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오. 배은망덕한 전갈을 구하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 노인은 “친구여, 침으로 쏘는 건 전갈의 본성이지요. 하지만 그 때문에 전갈을 구해주고자 하는 내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오”라고 말했습니다. 그 분이 구원하려 했던 전갈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결국 우리가 그분을 찌르고 아프게 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였습니다. 바보 예수님은 전갈 같은 타락한 본성을 가진 인간에게 찔리고 죽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그분의 본성은 조금도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바보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받고 예수님을 닮은 우리는 바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 땅에 교회가 세워진 이후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으로부터 항상 바보 취급을 받았고, 세상 사람들이 자기들과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무시당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바보가 되어야 사람의 영혼을 구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보가 되어 다른 사람들을 지혜 있게 하고,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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