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론
“가장 비싼 금은 ‘황금’이며, 가장 소중한 금은 ‘지금’이며, 가장 맛있는 금은 ‘소금’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소금이 왜 금같이 귀한 것인가는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잘 압니다. 소금은 가장 기본적인 제1의 맛이며, 인간이 먹는 유일한 암석이며, 인체 혈액 속에 0.9%의 염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염분은 인간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는 물질입니다.
로마시대에 소금은 금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로마군인의 봉급을 소금으로 주었습니다. ‘샐러리’라는 말은 소금이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중세유럽의 성주들은 소금을 독점하여 통치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소금이란 부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소금의 사대 기능이 있습니다. 순결, 방부, 조미, 비료가 그 기능입니다. 이런 기능은 다른 것으로 대치할 수 없는 소금만의 기능입니다. 그래서 소금은 예나 지금이나 귀한 물질로 인정되었습니다. 사람이나 동물, 심지어 식물까지도 생존에 염분이 필수적입니다. 우리나라 옛말에 ‘평안감사보다 소금장수’라는 말이 있을 만큼 소금은 귀한 존재로 여겨져 왔습니다.
성경에는 ‘소금 언약’이란 특이한 용어가 있습니다. 역대하 13:5에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 아니냐”라고 합니다. 민수기 18:19과 함께 두 곳에 ‘소금 언약’이란 용어가 있습니다. ‘소금 언약’이란 하나님과의 언약의 불변성을 의미하며, 원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언약은 절대로 변치 않고, 상하지 않고, 영원한 언약임을 말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소금의 용도를 보면 이렇습니다. 첫째는 정복한 땅에 소금을 뿌렸습니다(삿9:45). 둘째는 하나님께 드릴 소제물에 소금을 뿌렸습니다(레12:3). 셋째는 음식의 맛을 낼 때에 소금을 뿌렸습니다(욥6:6). 넷째는 탄생한 아기를 닦을 때에 소금을 사용했습니다(겔16:4). 그 외에도 소금의 용도가 많겠지만 정결의 의미, 불변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레위기 2:13에는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고 합니다. 언약의 소금은 언약 지속성,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과의 친교 그리고 불변성의 상징물이었습니다.
요즘에는 흔히 ‘맛이 갔다’는 말을 씁니다. 원래는 음식의 맛이 변하여 이상해졌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하고 본래 행동을 이탈하여 미쳤다는 뜻으로 쓰고 있습니다. ‘사람 맛이 갔다’, ‘폰 맛이 갔다’, ‘날씨 맛이 갔다’ 등의 표현을 합니다. 맛이 갔다는 말은 좋은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욕에 가깝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인 우리가 맛이 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맛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스다 무네아키의 ‘취향을 설계하는 곳, 츠타야’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그 사람의 한 마디로 그 사람의 삶의 본질을 꿰뚫고 그 사람과 사귈지를 정한다. 실언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말은 몸의 무늬다. 말에 헛됨이 없고 말에 힘이 있는 사람은 분명 그런 사람의 방식을 갖고 있다.”
‘말의 맛’이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말에도 맛이 있습니다. 달콤한 말이 있고, 쓴 말인 쓴 소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사용하는 말은 달콤한 말이어야 하고, 거룩한 맛이어야 하고, 남에게 유익을 주는 말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말에 소금으로 맛을 내어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는 은혜의 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말은 항상 은혜롭게 해야 맛이 납니다.
골로새서 4:6 상반절에는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불신자를 대하여 말을 할 때에 잘 다듬어진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고운 용어를 취사해야 합니다. 그러기 전에 우선 교회 안의 신자들끼리 아름다운 말의 습관을 배양해야 합니다.
“은혜 가운데서”라는 말은 “은혜롭게”라는 말입니다. 말을 은혜롭게 한다는 것은 말을 친절하게 하고, 인자하게 표현하라는 뜻입니다. 은혜로운 말은 듣는 사람에게도 유익하지만 자신에게 많은 유익을 줍니다. 은혜로운 말씀 때문에 자신의 인격이나 성품이 다듬어지고, 다른 사람에게 그 인격을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소금으로 맛을 내는 것”은 부패하고 더러운 말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깨끗하지 못한 말 흔히 표현하듯이 입에 담지 못할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더럽고 추한 말을 정제된 깨끗한 말로 다듬는 것을 소금으로 맛을 낸다고 표현합니다.
말을 맛깔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라 상대방을 기쁘게 하고, 편안케 하는 말이 맛있는 말입니다. 귀에 듣기 좋고 마음에 편안한 말이 맛이 있는 말입니다. 이런 말이 소금으로 맛을 낸 말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말에 대한 경고가 많습니다. 잠언 26:20에는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쟁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5:22에는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합니다. 야고보서 3:5에는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라고 합니다. 그 외에도 얼마나 많은 말에 대한 권고의 말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한 결 같이 말을 조심하, 은혜로운 말을 하라고 권합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팔려 애굽의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려갔을 때에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을 유혹하다 실패하자 요셉이 자신을 욕보이려고 했다고 거짓말로 무고하게 하여 요셉을 옥살이하게 하였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권력형 갑질입니다. 말 한 마디가 다른 사람의 평생 운명을 좌우할 때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합왕의 왕비 이세벨은 아합왕이 왕궁 아래에 있는 포도밭을 가지고 싶어 탐을 내는 것을 알고 거짓 증인을 세워 나봇이라는 평민의 포도밭을 빼앗았습니다. 이것도 벼룩이 간을 내 먹는 권력형 갑질입니다. 이런 권력형 갑질은 요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 수 없이 반복되었습니다.
말에 대한 속담과 격언도 넘치게 많습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말 한 마디에 천냥 빚도 갚는다’, ‘고기는 씹어야 맛이요, 말은 해야 맛이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맛없는 고기, 맛 없는 말도 있습니다. ‘말도 아름다운 꽃처럼 그 색깔을 가지고 있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아름다운 색깔을 가진 은혜로운 말을 선택해서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 좋은 언어 습관입니다.
맛있는 말이란 좋은 말입니다. 남을 칭찬하고, 용기를 주고, 배려하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상대방을 감동하고, 눈물을 짓게 하는 말이 맛있는 말이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언어습관입니다.
사람이 한 번 내뱉은 말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라지지 않는 중요한 말도 많이 있습니다. 무의미하지 않는 말입니다. 가슴에 새겨진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들을 아무개의 ‘어록’이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어린 사무엘의 말이지만 그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성경에 하나님은 식언치 않으신다고 하였습니다. 요즘 성경에는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이렇게 자신이 하는 말에 신실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많이 먹으면 독이 되고, 적당히 섭취하면 약이 되는 소금’이라고 합니다. 소금은 인간의 몸이 가장 필요로 하는 식품입니다. 소금은 우리 몸에 필요한 만큼 적당하게 섭취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우리의 말도 너무 많게도 말고 적게도 말고 적당히 해야 맛있는 말입니다.
잠언 25:11에는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라고 합니다. 상황에 맞는 적절한 말은 ‘은 그림 속에 금사과’라고 합니다. 상황에 맞게 재주 있게 구사되는 언어의 가치를 말합니다. 이런 말은 아름답게 들립니다. 즐겁게 들립니다. 기분 좋게 들립니다.
탈무드에는 세 가지 유머는 절대로 하지 말라고 합니다. 첫째는 성적인 유머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유머입니다. 셋째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유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세 가지 종류의 유머를 빼면 없습니다. 성적인 유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유머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유머입니다.
서양사람들은 식탁에서 쉴 새 없이 이야기를 합니다. 처음에 미국에 유학을 가서 제일 힘든 것이 바로 식사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밥 먹을 때 말하지 말라고 해서 밥 먹을 때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서양사람들이 식탁에서 금지하는 말이 있습니다. 정치에 관한 것과 타인을 비난하는 이야기입니다. 왜 이 두 가지 종류의 이야기를 식사 시산에 금합니까? 그런 이야기 하면 밥맛이 없으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결코 하지 말아야 할 말은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말과, 화를 일으시는 말고, 시기하는 말고, 욕하는 말과, 비방하는 말들입니다.
욥기 6:6에는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고 합니다. 맛있게 먹기 위해서는 소금이 필요합니다. 소금은 맛을 내는 제일의 양념입니다. 우리의 말을 은혜롭게 소금 맛을 내어 감동을 주고, 칭찬을 하고, 정직하게 하고, 위트와 유머를 갖추고, 교양을 주고, 용기를 북돋우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인다운 거룩하고 은혜롭고 맛있는 말을 하는 주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맛을 낸 말은 상대에게 좋은 대답을 줍니다.
골로새서 4:6 하반절에는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고 합니다. 신자들끼리 하는 말이 맛을 내면 교회 밖의 사람에게도 맛있는 대답을 할 것입니다. 불신자에게 좋은 말을 하고, 묻는 말에 대한 적절한 대답은 그들의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대변인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사입니다. 대사는 자기의 말을 하고 자기의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보낸 이의 말을 하고, 보낸 이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말을 하고, 좋은 말을 전하고, 적절한 대답을 해야 합니다. 묻는 말에는 언제나 친절히 대답을 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3:15에는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라고 합니다. 항상 온유와 두려움으로 거룩한 대답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대답은 더구나 거룩해야 하는 것입니다.
온유한 대답이란 최고의 맛을 낸 말이며 대답입니다. 온유란 ‘마음이 부드럽고 행동이 친절함’이란 뜻인데 그리스도인의 대답은 부드럽고 친절해야 합니다. 이런 대답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감동을 주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할 것입니다.
두려움의 대답이 무엇일까요? 우리의 두려움이란 세상 두려움이 아닌 하나님 두려움입니다. 진정한 두려움이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대답이 그냥 입술로 건성으로 하는 대답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대답이어야 합니다. 소금으로 맛을 낸 대답은 하나님께도 영광이 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대답이 된다는 것입니다.
대답이란 언제나 질문에 대한 바른 응답을 요구하고 기대합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질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른 응답을 기대하시는데 바르게 응답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 때문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하나님의 질문에 엉뚱한 대답만 하고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셨는데 아담은 엉뚱하게 “내가 벌거벗었으므로 숨어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라고 물으셨는데 가인은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오히려 반항적으로 대꾸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하갈에게 ”네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라고 물으셨는데 하갈은 ”여주인 사래의 눈을 피하여 도망가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물으심에 대한 죄를 지은 인간의 대답은 한 결 같이 맛이 없는 대답이었습니다.
‘우문현답’(愚問賢答)이란 말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질문을 받고 현명한 답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대화를 보면 인간에게 ‘현문우답’(賢問愚答)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질문에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언제나 어리석은 대답만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현답은 현심(賢心)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슬기와 은혜가 있는 현심에서 현답이 나옵니다. 우리의 마음을 소금으로 맛을 내면 현답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가 우리의 말을 아름답게 하고, 우리의 대답을 슬기롭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실 때 빌라도가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 왕이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질문에 “네 말이 옳도다”라고 아주 간단하게 대답하셨습니다. 그 후에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느냐?”라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대답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대답할 가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대답하지 않는 것이 가장 슬기로운 대답일 때가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혼인잔치의 비유’를 보면 잔치에 초청한 사람들이 오지 않자 길거리에 가서 사람들을 다 모아서 잔치에 들어오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예복을 갖추어 입지 않은 사람에게 주인이 “너는 왜 예복을 입지 않고 왔느냐?”라고 질문하였습니다. 주인의 질문에 예복을 입지 않은 이 사람은 “아무 말도 못하거늘”이라고 합니다. 개역성경은 “유구무언이어늘”이라고 했습니다. 입이 있어도 말을 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항상 주인의 질문에 가장 슬기로운 대답을 할 말을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4:29에는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합니다. 우리 입의 모든 말은 덕을 세우고, 은혜를 끼쳐야 합니다. 우리의 말이 사람을 감동하고, 구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가장 위대한 청교도 신학자이며 존 번연과 동시대 인물인 존 오웬은 찰스 2세가 왜 무식하고 어설픈 설교자의 설교를 들으러 가느냐고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폐하, 그 어설픈 설교자처럼 설교할 수 있다면 제 모든 학식을 포기하겠습니다,” 오웬의 이 대답을 듣고 찰스 2세도 그 어설픈 설교자의 설교를 듣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현답은 누구에게나 감동을 주고, 은혜가 있습니다.
잠언 10:32에는 “의인의 입술은 기쁘게 할 것을 알거늘 악인의 입은 패역을 말하느니라”고 합니다. 의인인 하나님의 사람은 입술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맛을 낸 말을 해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흡족한 대답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상대를 말로 기쁘게 하고, 만족하게 하는 대답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 마을에 산적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마을 사람들이 황급히 피신하였습니다. 그 마을에는 수도원의 수도사들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침략자들은 마을에서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 때 수도사 한 명이 침략자들을 찾아갔습니다. “당신들은 이곳의 평화를 파괴하였소. 당장 여기를 떠나주길 바라오.” 두목이 칼을 꺼낸 후에 말했습니다. “내 눈을 깜짝하지 않고 너를 두 토막으로 만들 수 있다.” 수도사는 침착하게 말했습니다. “나도 눈도 깜짝하지 않고 두 토막이 될 수 있다.” 수도사의 이 대답에 놀란 두목은 부하들을 데리고 다음 날 마을을 떠났다고 합니다. 지혜로운 대답은 용기 있는 대답입니다. 신앙 힘으로 하는 맛있는 대답은 산적도, 우리의 원수도, 세상 사람도 다 변화시키고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소금의 성질은 짜게 하는 것입니다. 소금이 짜게 하려면 녹고, 사라지고, 보이지 않아야 합니다. 내가 죽고, 사라지고, 보이지 않게 될 때에 소금으로 맛을 낸 말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맛있는 삶을 사는 것은 내가 희생되고, 내가 보이지 않고, 하나님이 보이게 하는 삶으로 비로소 가능한 삶입니다.
플리니는 “소금과 햇빛보다 유용한 것은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소금의 용도와 가치를 햇빛에 비한 것입니다. 참 가치 있고 귀한 것이 소금입니다. 우리의 말이 소금으로 맛을 낸 말이 되고,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이 맛을 낸 지헤와 가치가 있기를 바랍니다.
결론
어떤 정신병자가 바나나를 소금에 찍어 먹었습니다. 의사가 왜 바나나를 소금에 찍어먹느냐고 물어보았답니다. 그랬더니 이 정신병자가 “내가 미쳤어, 소금을 그냥 먹게?”라고 하더랍니다. 소금은 맛을 내기 위한 것입니다. 소금은 가장 기본적인 맛을 냅니다. 소금이 짠 맛을 잃고 맛을 내지 못한다면 소금은 더 이상 소금이 아닙니다. 소금의 기능을 잃은 것입니다. 소금으로 맛을 내되 싱겁지 않게, 짜지 않게 소금을 적절히 잘 쳐야 합니다. 양식당에 가면 일반적으로 소금과 후추가 테이블에 놓여 있습니다. 친절하게 소금과 후추를 표시한 병도 있지만 대게는 작은 구멍이 있습니다. 대체로 구멍이 둘이 있는 것이 소금이고, 구멍이 셋이 있는 것이 후추입니다. 그런데 어떤 양식당에 가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긴 합니다. 소금 병의 구멍이 후추 병의 구멍보다 수가 적은 것은 짜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동물의 세계’을 보면 동물들도 염분을 구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곰도 먹이를 실컷 먹지만 염분을 섭취하기 위하여 소금바위를 갉아 먹습니다. 곰의 몸에 소금이 없으면 겨울잠을 자지 못한답니다. 염분이 부족하면 몸이 겨울나기에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근동 연해주에 사는 사슴은 바닷물에서 염분을 얻으려고 동쪽 바닷가로 떼를 지어 이동을 합니다. 이때는 연해주의 어느 마을 전체가 사슴 사냥의 절기라고 합니다.
우리 몸에는 소금이 필수입니다. 우리말에도 소금이 필수입니다. 우리의 말이 유익하고, 기쁨을 주고, 도움을 주고, 용기를 주는 말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말은 다른 사람의 귀에 듣기가 좋고, 말에 은혜가 묻어나야 합니다.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로 우리 스스로가 그리스도인임을 증거하는 맛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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