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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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이성희 담임목사
설교일 2018.9.2
설교본문 스가랴 3:3-5 / 갈라디아서 3:26-28

서론

“복식의 기원은 생리적 욕구와 안전의 욕구이다”라고 합니다. 인류가 옷을 입은 것은 하나님의 창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리고 옷을 입는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자신의 몸을 가리는 기능을 하고, 아름다움을 뽐내는 패션의 기능을 하고, 몸을 더위와 추위 그리고 상처로부터 보호의 기능을 합니다. 옷이란 사람이 살아가는데 아주 중요한 도구입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개성시대’라고 합니다. 자신의 개성을 최대한 발휘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튀어야 산다’는 말까지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는 ‘너무 튀면 죽는다’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개성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자기 개성만을 주장하며 자기 편한 대로만 사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고 오히려 혐오감을 주는 것입니다.
옷은 누구나 입고 삽니다. 옷을 입되 잘 입어야 합니다. 흔히 ‘베스트 드레서’(Best dresser)라고 하여 옷을 잘 입는 사람을 칭찬합니다. 옷을 잘 입는 사람은 자신이 가는 장소와 자신이 만나는 대상의 성격에 따라 옷을 적절하게 입는 사람입니다. 옷의 가치는 사람의 가치이며, 옷은 사람의 인품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도구입니다.
옷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아주 중요한 신분의 표시이며, 정체성의 도구입니다. 무슨 옷을 입는가, 옷을 어떻게 입는가 라는 것은 중요한 사회성입니다.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볼 때 무슨 옷을 어떻게 입는가 하는 것은 중요한 신앙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먹는 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먹되, 입는 것은 남을 위해서 입어야 한다”(Eat what you like, but dress for the people)고 하였습니다. 옷은 내가 입지만 남을 위한 것입니다. 옷은 나의 소유이지만 남을 위해 사용하고, 내가 입지만 시각적으로 다른 사람이 보기에 좋아야 합니다.
옷은 자신의 인격이나, 직업이나, 현재의 상태를 잘 말해 줍니다. 옷만큼 자기 자신을 잘 표현해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옷은 중요한 삶의 도구입니다. 그리고 옷을 개성대로 입지만 아무렇게나 입는 것은 아닙니다.
옛 귀족들이나 양반들에게 옷은 중요하였습니다. 흔히 의관(衣冠)이라고 하여 절대 흩트리지 않는 것이 예의였습니다. 우리 옛날 전통에는 양반들은 방안에서도 의관을 반듯하게 입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옷을 흩트리지 않는 것이 예의였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생존의 필수요건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의식주’(衣食住)라 부릅니다. 입는 것과 먹는 것과 사는 집이 생존에 필수요인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의’가 다른 두 가지 보다 더 중요합니다. 우리나라 사람에게 옷이 가장 중요한 이유는 체면문화 혹은 외형문화의 결과라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패션이 발달하는데, 패션은 미래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분야 중의 하나이므로 세계화 시대에 유익한 점도 많습니다.
하나님은 옷을 벗기고 입히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어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엮어 입고 있을 때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제사장의 옷을 친히 지어 입히라고 모세에게 “네 형 아론과 그 아들들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 아론이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들의 백합화까지 입히시기에 예수님은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훗날 하나님의 나라에 가면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라고 합니다. 어떤 이는 옷은 ‘죄의 상징’이므로 벗고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입는 옷은 하나님의 ‘은혜의 조치’입니다.
우리가 새 옷을 입기 전에 할 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헌 옷을 벗어야 합니다. 둘째는 몸을 깨끗이 씻어야 합니다. 새 옷을 입을 때 헌 옷을 입은 채로 입지는 못합니다.
오늘 성경의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제사장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보시고 천사 앞에서 수치와 비난을 당하게 하십니다. 심각한 죄의 상태에 있던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책망하신 것입니다. 제사장이 심각한 죄의 상태에 있다면 백성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사회를 한번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세요. 죄가 얼마나 가득 차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사회의 죄를 보고 계시지만 인내하십니다. 그리고 더러운 옷을 벗기고 아름답고 깨끗한 새 옷으로 갈아입히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더러운 옷을 벗고 하나님이 주시는 새 옷으로 갈아입는 은혜가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 앞에서는 더러운 옷을 벗어야 합니다.

스가랴 3:4 상반절에는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벗기라고 하십니다. 여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지었지만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더러운 옷을 입은 채로 살라고 하셨다면 절망이지만 하나님은 회복의 기회를 주십니다.
“더러운”이란 말의 히브리어는 ‘초임’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가장 간악하고 혐오스러운 성격의 더러움을 표현합니다. 히브리어 단어 중 가장 강력한 표현이 이 단어입니다. 인간의 죄가 얼마나 더러우면 이렇게 말씀하시겠습니까?
1절에 보면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고 합니다. 대제사장과 사탄이 함께 천사 앞에 서 있습니다. 사탄은 천사에게 여호수아의 죄를 지적하고 고발합니다. 사탄은 정결하지 못한 성도의 상태를 문제 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로 정결하지 못한 것이 사함을 받는 것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옷이 더러워졌다고 사람을 버리지는 않으십니다.
아기들이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나면 옷이 다 더러워집니다. 옷이 더러워졌다고 아기에게 밥을 안주는 부모는 없습니다. 아이들이 밖에 나가서 놀고 오면 옷이 더러워져 엉망이 됩니다. 옷이 더러워졌다고 아이를 집에 못 들어오게 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부모는 더러워진 아이의 옷을 갈아입힙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사랑하니까 그렇게 합니다. 요즘 말썽이 많은 어린이집 아동학대를 보세요. 아이가 밥을 먹다가 흘렸다고 때리기도 하고, 잠을 자지 않는다고 이불을 뒤집어씌우기도 하고, 말을 듣지 않는다고 귀를 잡아당기기도 하고, 오줌을 쌌다고 들어서 던지기도 합니다. 아이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사랑이라곤 조금도 없으니 더러운 옷을 지적하고 고발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니 더럽힌 옷을 반드시 지나치지 않고 탓하시지만 곧 사랑으로 가라입히십니다.
갈라디아서 3:27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사람은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사람은 자신의 옷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드러나야 합니다.
인간의 첫 개혁의 경험은 옷을 갈아입는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개혁(改革)은 가죽으로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이 무화과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걸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그것을 벗기시고 가죽으로 옷을 지어 갈아입혔습니다. 가죽옷은 동물이 희생함으로 지을 수 있는 희생의 옷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양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희생되시므로 우리의 벌거벗은 수치를 가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가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의 옷인 무화과 잎의 치마를 벗고 예수님의 희생의 가죽 옷을 입기를 바랍니다.
금방 말라버릴 나뭇잎으로 옷을 지어 입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세상의 옷을 보세요. 금방 있다가 잠시 후에 사라질 것들로 지은 옷입니다. 세상의 더러움의 옷은 유혹이나 욕심이나 세상에 집착하는 생각들을 일으키는 옷입니다. 이 모두가 순식간에 벗겨지고 사라질 것입니다. 이런 부질없는 죄의 옷을 속히 훌훌 벗어버리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13:12에는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합니다. 어두운 밤이 지나고 낮이 가까우면 밤의 옷을 벗어야 합니다. 어둠의 일을 벗어야 합니다. 그리고 빛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빛의 갑옷이라고 하였습니다. 빛의 옷을 든든하게 입어야 합니다. 전투하는 자세로 옷을 입어야 합니다.
선지자 엘리야가 모든 사명을 마치고 엘리사에게 사명을 전수합니다. 엘리사는 먼 길을 떠나 하나님께로 가는 엘리야를 따라 길갈에서 벧엘로, 벧엘에서 여리고로, 여리고에서 요단으로 따라갑니다. 요단에서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가자 엘리사는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고 요단을 건넜습니다. 하늘에 오르기 전 엘리야는 제자 엘리사에게 자신의 권능의 옷으로 갈아입혔습니다.
우리나라는 ‘삼연’의 사회라고 합니다. 혈연(血緣), 지연(地緣), 학연(學緣)이 사회를 움직이는 힘이고, 사회에서 생존하는 중요한 도구입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에 요즘에는 이것들 외에 또 다른 연이 있습니다. ‘이연’(理緣)과 ‘종연’(宗緣)입니다. 요즘에는 이념과 코드가 다른 어떤 것보다 사회생활 특히 출세에 중요하고, 종교적 연고주의가 지나칠 정도로 강한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관료사회에서는 특정학교 출신이 지배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고 말이 많습니다. 어느 한 집단이 지배적 구조를 이루면 의사결정이나 판단에 편향적 결과가 올 것은 뻔한 일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심한 곳이 법조계라고 합니다. 가장 공평하게 판결해야 할 법조계가 지배적 구조를 가진다면 공평하기란 이미 틀렸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학벌주의가 독점현상을 강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벌주의 헌옷 벗고 능력주의 새 옷 입자”라고 하지만 헌옷을 사람의 의지로 벗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오래 전 어느 교회를 섬길 때에 오랫동안 정성과 열심히 부처를 섬기던 불자가 전도를 받고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마침 제가 맡은 교구의 가정이기에 제가 심방을 했습니다. 그 분이 거의 반평생을 입던 회색 보살바지, 불상, 불경, 목탁 등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을 모두 모아서 큰 보자기에 싸놓고 저에게 가지고 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것을 다 모아서 교회에 가지고 왔습니다. 과거에 입던 모든 옷을 벗었다는 것은 과거의 삶을 청산했다는 뜻입니다. 과거의 옷이 없다는 것은 과거의 삶을 청산하고 새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 전에 본 영화 가운데 ‘강화도령’이라는 조선 철종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강화의 개구쟁이였던 아이를 데리고 궁중에 와서 옷을 다 벗기고 궁중의 예법에 따라 임금의 옷을 입힙니다. 헌 옷을 벗고 새 옷을 입음으로 신분이 바뀌고 새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골 3:9),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엡 4:22),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히 12:1) 등 옛 행위, 옛 사람, 옛 죄를 벗으라고 권합니다. 하나님께서 더러운 옷을 벗기시는데 우리가 다시 입을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다시 헌 옷을 입지 말아야 합니다. 벗은 헛 옷은 다시 입을 가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벗기시는 더러운 헌 옷은 영원히 벗고 다시 입지 않을 옷입니다.

둘째, 죄악을 제거하면 아름다운 옷을 입히십니다.

스가랴 3:4 하반절에는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라고 합니다. 더러운 옷을 벗기셨다는 것은 죄악을 제거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죄악을 제거하시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십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은 죄를 용서하시고 새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사탄은 여호수아를 비난하고, 죄를 지적하고, 고발하고, 책망하고, 직분을 박탈하려고 하지만 여호와의 선언은 죄과를 제하여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 옷을 입히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더러운 옷을 벗어야 비로서 아름다운 새 옷을 입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헌 옷을 벗기시고 아름다운 옷을 입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새 옷을 입히시는 분이십니다. 새 옷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이사야 61:10에는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고 합니다. 이사야 61장은 장차 회복될 새로운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신 장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하나님은 신랑신부가 단장한 모습처럼 아름다운 옷을 입히신다고 합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보세요. 아들이 돌아왔을 때 반갑게 맞은 아버지는 아들에게 제일 먼저 새 옷으로 갈아입힙니다. 그리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줍니다. 다음에 신을 갈아 신깁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잔치를 베풉니다. 성경은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라고 합니다.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에게 제일 먼저 한 일은 제일 좋은 새 옷으로 갈아입히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이 돌아올 때 입고 온 옷은 아버지의 아들이 입을 옷이 못 됩니다. 잔치자리에 입고 갈 옷이 아닙니다. 잔치 전에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돌아온 탕자가 아들인 증거가 여럿입니다. 갈아입은 옷이 아들의 옷입니다. 가락지를 끼웠다는 것은 아들의 인장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신발을 신겼다는 것은 귀한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당시에 품꾼이나 노예는 신발을 신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아들의 옷이 있습니다. 종은 종의 옷이 있습니다. 아들이 종의 옷을, 종이 아들의 옷을 입을 수는 없습니다. 그 옷으로 아들인지, 종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옷만 봐도 신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잃었다가 다시 얻었다”고 합니다. 그 아들은 다시 살아서 돌아온 아들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아들에게 죽은 사람의 옷인 수의를 입혀 놓을 수 없습니다. 탕자의 새 옷은 다시 살아나는 옷입니다. 잃었다 새로 얻은 옷입니다. 죽은 자의 옷, 버림받은 자의 옛 옷을 벗고 산 자의 옷을 입은 것입니다.
로마서 13:14에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면 정욕을 위한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고 죄를 짓고 살지는 못할 것입니다. 죄악을 멀리 떠날 것입니다. 더 이상 더러운 삶을 살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주일이면 입는 이 셔츠를 ‘클러지칼라’라 합니다. 가톨릭 신부들이 입는다고 해서 ‘로만칼라’라고도 합니다. 이 셔츠는 신부복이 아니라 개신교 목사님들이 먼저 입기 시작했습니다. 이 옷은 참 편하고 어떤 넥타이를 맬까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 옷을 입으면 행동이 절제됩니다. 이 옷을 입고 나쁜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옷은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신분을 드러내는 옷입니다. 이 옷이 경건한 삶을 도와줍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거룩한 자들로 ‘클러지칼라’가 아니라도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살아야 합니다.
출애굽기 28:4에는 “그들이 지을 옷은 이러하니 곧 흉패와 에봇과 겉옷과 반포 속옷과 관과 띠라 그들이 네 형 아론과 그 아들들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 아론이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고 합니다. 제사장의 옷은 아주 거룩하고 복잡합니다. 흉패, 에봇, 겉옷, 반포 속옷, 관, 띠가 제사장의 의복입니다. 제사장은 아무 옷이나 입지 않습니다. 제사장은 모름지기 정결하고 의미 있는 옷을 입어야 합니다. 여호수아도 이렇게 옷을 입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옷이 더러워졌다고 하시며 새로운 아름다운 옷으로 갈아입히셨습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거룩해보여도 마음의 옷이 더러워지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지난 번 갔었던 이집트의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그 옷이 아주 특이했습니다. 수도사의 옷은 통옷입니다. 모자부터 전체가 이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옷은 솔기가 없고 이음새가 없는 통옷이었습니다. 수도사들이 모자를 쓰는 이유는 내 머리를 하늘을 향해 보이게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지식을 가린다는 것입니다. 수도사들의 옷과 모자 사이에는 띠가 있습니다. 모자 안쪽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리고 옷 안에는 가죽 허리띠가 있습니다. 가죽 허리띠는 예수님께서 맞으셨던 채찍을 상징하고, 허리에 수건을 동이신 섬김을 상징합니다. 수도사들이 이 옷을 입고 딴 생각을 하고 살 수 있겠습니까? 이 옷을 입고 아침 기도 때마다 ‘키리에 엘레이손’을 41번 암송합니다. 전승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실 때 41번 채찍을 맞으셨다는데 이것을 회상하는 것입니다. 수도사들은 그들의 생각에 아름다운 옷을 입힙니다. 그리고 속옷도 아름답게 만듭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공격할 때 아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여리고에서 옷 한 벌을 훔쳐왔습니다. 옷에 대한 탐심 때문입니다. 이 일 때문에 하나님은 진노하셨고 다음 전쟁에서 패하게 하셨습니다. 지나친 패션에 대한 욕심과 옷이 죄를 짓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옷을 경건하고 거룩하게 만들어주십니다.
요한계시록 19:8에는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고 합니다. 훗날 하나님의 나라에 가면 빛나고 깨끗한 옷을 입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옷은 옳은 행실입니다. 이 옷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에머슨은 “옷을 깔끔하게 입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개들도 좋은 옷을 입은 사람은 공격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 살면서 개에게 공격 당하지 않는 옷을 입읍시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사탄에게 공격 당하지 않는 옷을 입어야 합니다.
죄의 옷은 사탄이 입힌 옷입니다. 사탄의 옷을 과감하게 벗어야 합니다. 의의 옷은 하나님이 입히신 옷입니다. 하나님께서 입히신 옷을 입어야 합니다. 우리가 옷으로도 죄를 짓지 말고 항상 정결하고 의로운 옷을 입고 살아야 합니다.
창세기 35:2에는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고 합니다. 야곱과 식구들이 다시 벧엘에 올라갈 때에 야곱이 온 가족에게 의복을 바꾸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집, 벧엘에 올라가는 사람은 옷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집인 벧엘에 올라가는 사람들로서 더러운 세상의 옷을 벗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의 의복으로 바꾸어 입고 사는 정결한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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